2014년 7월 25일 금요일

[영어대체] Reading #3 - Mute in an English-Only World

Mute in an English-Only World Chang-rae Lee
 
 
When I read of the troubles in Palisades Park, N.J., over the proliferation of Korean language signs along its main commercial strip, I unexpectedly sympathized with the frustrations, resentments and fears of the longtime residents. They clearly felt alienated and even unwelcome in a vital part of their community. The town, like seven others in New Jersey, has passed laws requiring that half of any commercial sign in a foreign language be in English.
 
내가 뉴저지의 palisade 공원에서 주요 상업지대를 따라서 한국어로된 간판이 확산되고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거리(논란) 글을 읽었을 때, 나는 기대하지도 않게 오래 살았던 거주민들의 좌절, 분노, 공포를 공감을 하였다. 그들의 지역사회의 중요한 부분에서 소외되고, 푸대접받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뉴저지주에 있는 다른 7개 도시와 마찬가지로 그 작은 도시도 외국어로된 상업적인 어떠한 간판이든 반쪽은 영어로 써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Now I certainly would never tolerate any exclusionary ideas about who could rightfully settle and belong in the town. But having been raised in a Korean immigrant family, I saw every day the exacting price and power of language, especially with mt mother, who was an outsider in an English-only world. In the first years we lived in America, my mother could speak only the most basic English, and she often encountered great difficulty whenever she went out.
 
나는 지금 분명히 누가 정당하게 그 도시에 정착해서 속해서 살수 있는가에 관한 어느 배타적인 생각들도 용납하지(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계 이민 가정에서 자라난 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힘과 가치를 영어만이 사용되는 세계에서 outside 였던 우리 어머니와 더불어서 매일 보았다. 우리가 미국에 살았던 첫 몇 년 동안 우리 어머니는 기본적인 영어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출하실때마다 커다란 어려움에 부딫히시곤 하셨습니다.
 
We lived in New Rochelle, New York, in the early seventies, and most of the local businesses were run by the descendants of immigrants who, generations ago, had come to the suburbs from New York City. Proudly dotting Main Street and North Avenue were Italian pastry and cheese shops, Jewish tailors and cleaners, and Polish and German butchers and bakers. If my mother's marketing couldn't wait until the weekend, when my father had free time, she would often hold off until I came home from school to buy the groceries.
 
우리는 70년대 초반에 뉴욕 New Rochelle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상점들 대부분은 뉴욕시에서 교외로 이사 온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운용하는 pastry와 치즈 가게... 등등이 당당하게 Main Street and North Avenue에 점을 찍고 있었다(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엄마는 장보는 것을 우리 아빠가 시간을 낼 수 있는 주말까지 기다릴수 없을 때면, 그녀는 내가 학교에서 집으로 올때까지 식품 사는 일을 미뤄두고 있었다.
Though I was only six or seven years old, she insisted that I go out shopping with her and my younger sister. I mostly loathed the task, partly because it means I couldn't spend the afternoon off playing catch with my friends but also because I knew our errands would inevitably lead to an awkward scene, and that I would have to speak up to help my mother.
 
그때 나 나이는 6~7살 밖에 안됐지만 그녀는 내가 어머니하고 나의 여동생과 함께 쇼핑하러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그 일(장보는 일)이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오후에 친구들과 함께 캐치볼을 하며 놀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보러 가는 일은 불가피하게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나는 엄마를 도와주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이 몹시 싫었다.
 
I was just learning the language myself, but I was s quick study, as children are with new tongues. I had spent kindergarten in almost complete silence, hearing only the high nasality of my teacher and comprehending little but the cranky wails and cries of my classmates. But soon, seemingly mere months later, I had already become a terrible ham and mimic, and I would crack up my father with impressions of teachers, his friends and even himself. My mother scolded me for aping his speech, and the one time I attempted to make light of hers I rated a roundhouse smack on my bottom.
 
나는 영어를 나 혼자서 터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새 언어를 배울 때 그러는 것처럼 빨리 배웠다. 나는 유치원 다닐 때 꿀 먹을 벙어리로 지냈다. (완벽한 침묵 속에서 보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선생님의 높은 콧소리 뿐이었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같은 반 친구들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와 외침소리 뿐이었다. 그런데 곧,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나는 금방 정말 놀라울 정도로 흉내잘내는 사람(남의 흉내나내는 3류 배우)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과 아버지 친구들, 심지어는 아버지 목소리 흉내내는 것으로 아버지를 웃게 만들곤 했다.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말을 흉내낸다고 꾸짖었다. 그리고 한번은 내가 엄마 목소리를 흉내내려고 시도했을 때, 나는 엉덩이 한 대를 크게 철썩 맞아야 했습니다.
 
For her, the English langue was not very funny. It usually meant trouble and a good does of shame, and sometimes real hurt. Although she had a good reading knowledge of the language from university classes in South Korea, she had never practiced actual conversation. So in America she used English flash cards and phrase books and watched television with us kids. And she faithfully carried a pocket workbook illustrated with stick-figure people and compound sentences to be filled in.
 
그런데, 엄마에게 있어서는 영어가 그렇게 즐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어가 어머니에게는 보통 골치아픈 것, 굉장히 부끄러운 것, 때로는 진짜 상처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비록 한국에서 대학교 다닐 때는 상당한 영어 독해실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한국에서 실제로 대화를 한번도 안해봤다. 미국에서 그녀는 flash card를 사용하고, 어구를 적어놓은 책도 보고, 우리와 함께 아이들이 보는 책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늘 선으로만 사람을 그려넣은 삽화가 있고, 채워넣어야 할 복잡한 문장이 있는 poket용 workbook(연습책)을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But none of it seemed to do her much good. Staying mostly at home to care for us, she didn't have many chances to try out sundry words and phrases. When she did, say, at the window of the post office, her readied speech would stall, freeze, sometimes altogether collapse.
그러나, 이것 어느 것도 어머니에게는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잘 돌보기 위해 그녀는 집에만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다양한 단어나 어구들을 시도해 볼만한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우체국 창구에서 준비해간 말을 시도해볼 기회를 가졌을 때, 멈춰버렸고, 때로는 무너져 버렸다.
 
One day was unusually harrowing. We ventured downtown in the new Ford Country Squire my father and bought her, an enormous station wagon that seemed as long -and deft- as an ocean liner. We were shopping for a special meal for guests visiting that weekend, and my mother had heard that a particular butcher carried fresh oxtails, which she needed for a traditional soup.
 
하루는 다른 때와는 달리 가슴이 아픈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사준 유람선처럼 길죽하고 매끈하게 생긴 큼직한 station wagon인 Ford사 Country Squire를 타고 시내에 나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주말에 방문할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쇼핑을 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어떤 정육점에서 신선한 소꼬리를 팔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소꼬리는 그녀가 한국전통 국(꼬리곰탕)을 끓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We'd never been inside the shop, but my mother would pause before its window, was always lined with whole hams, crown roasts, and ropes of plump handmade sausages. She greatly esteemed the bounty with her eyes, and my sister and I did also, but despite our desirous cries she'd turn us away and instead buy the packaged links at the Finast supermarket, where she felt comfortable looking them over and could easily spot the price. And, of course, not have to talk.
 
우리는 그 가게(정육점)에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지만 우리 엄마는 고급 햄, 최고급 로스트, 그리고 통통한 수제 소세지가 줄지어서 진열되어있는 그 진열장앞에 먼저 멈춰 섰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눈으로 부러운 듯이 고급상품(진열장의 햄과 소시지 등)을 바라보았고, 그건 나와 내 동생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우리가 사달라고 엄마를 조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우리를 돌려세운 후, Finast 슈퍼마켓에서 포장된 것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품들은 편안하게 살펴볼 수 있고, 쉽게 가격이 얼마인지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But that day she was resolved. The butcher store was crowded, and as we stepped inside the door jingled a welcome. No one seemed to notice. We waited for some time, and people who entered after us were now being served. Finally an old woman nudged my mother and waved a little ticket, which we hadn't taken. We patiently waited again, until one of the beefy men behind the glass display hollered our number.
 
하지만 그날 어머니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정육점은 매우 붐볐습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환영의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를 눈여겨 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다음에 들어온 사람들이 물건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한 나이든 여자가 우리 어머니를 쿡 찔렀고, 작은 티켓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이 티켓은 번호표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참고 기다렸고, 마침내 유리진열장 뒤에 정육점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 번호를 크게 불렀습니다.
My mother pulled us forward and began searching the cases, but the oxtails were nowhere to be found. The man, his big arms crossed sharply said, "Come on, lady, whaddya want?" This unnerved her, and she somehow blurted the Koream word for oxtail, soggori.
 
그러자 우리 엄마는 우리를 앞세워 밀고, 케이스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소꼬리는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정육점 직원이 굵은 팔을 팔짱 낀 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 뭘사시겠습니까?” 이 말이 그녀의 기를 죽였고, 그녀는 그만 oxtails에 해당하는 한국말 소꼬리를 말하고 말았습니다.
 
The butcher looked as if my mother had put something gour in his mouth, and he glanced back at the lighted board and called the net number.
 
그러자 그 정육점 직원은 마치 우리 엄마가 자기 입안에 불쾌한 것을 집어넣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하고는 (똥씹은 표정을 하고는) 눈을 뒤로 돌려서 불켜져있는 판을 바라보고는 다음 번호를 불렀다.
 
Before I knew it, she had rushed us outside and back in the wagon, which she had double-parked because of the crowd. She was furious, almost vibrating with fear and grief, and I could see she was about to cry.
 
내가 알기도 전에(순식간에) 그녀는 우리를 몰고 밖으로 나가서, 우리가 세워둔 차 뒤로 갔다. 그 차는 복잡해서 이중주차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났습니다. 거의 두려움과 슬픔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곧 우리 엄마는 울 것 같다는 것을 내가 알수가 있었습니다.
 
She wanted to go back inside, but now the driver of the car we were blocking wanted to pull out. she was shooing us away. My mother, who had just earned her driver's license, started furiously working the pedals. But in her haste she must have flooded the engine, for it wouldn't turn over. The driver started honking and then another car began honking as well, and soon it seemed the entire street was shrieking at us.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로막고 있는 차의 주인이 차를 빼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여자는 우리에게 소리질러 나가라고 했습니다.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된 우리엄마는 화가나서 바로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엔진에 기름이 넘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가로막고 있는 차의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다른 차가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고, 온 거리가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In the following years, my mother grew steadily more comfortable with English. In Korean, she could be fiery, stern, deeply funny ironic; in English, just slightly less so. If she was never quite fluent, she gained enough confidence to make herself clearly known to anyone, and particularly to me.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우리 엄마는 점점 영어가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어로는 어머니가 굉장히 불 같이 화낼 수도 있고, 엄격할 수도 있고, 재미있고, 아이러니 하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그것보다 조금 못할 뿐이었습니다. 비록 어머니가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누구에게든 특히 나에게, 분명하게 알릴수 있는 충분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Five years ago she died of cancer, and some months after we buried her I found myself in the driveway of my father's house, washing her sedan. I like taking care of her things; it made me feel close to her. While I was cleaning out the glove compartment, I found her pocket English workbook, the one with the silly illustrations. I hadn't seen it in nearly twenty years. The yellowed pages were brittle and dog-eared. She had fashioned a plain paper wrapping for it, and I wondered whether she meant to protect the book or hide it.
 
오년 전,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땅에 묻고 나서,.몇 개월이 지난 후에 나는 아버지의 집의 driveway에서 그녀의 차를 세차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물건을 보살피는 것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보면 어머니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어머니 차를 청소하다 자동차 서랍에서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어머니의 포켓용 영어책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최근 20년 동안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차를 청소하다가 글로브 컹...청소하다가 어머니의 포켓용 영어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우스꽝 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으 l20년 동안 보지 못했던 책이었습니다. 누렇게 변색된 책장들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고 곳곳이 접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책을 보통 종이로 표지를 싸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책을 표지를 싼 것이 그 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감추기 위한것이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I don't doubt that she would have appreciated doing the family shopping on the new Broad Avenue of Palisades Park. But I like to think so, too, that she would have understood those who now complain about the Korean-only signs.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Palisades Park 의 새로운 Broad Avenue에서 가족을 위해 쇼핑을 하셨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난 나는 또한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머니는 한국어로만 되어있는 간판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I wonder what these same people would have done if they had seen my mother studing her English workbookㅡor lost in a store. Would they have noded gently at her? Would they have lent a kind word?
 
나는 이 똑같은 사람들(한국어 간판에 불평하는 사람)이 만일 workbook으로 영어공부를 하는 혹은 영어를 못해서 가게에서 물건을 못사고 쩔쩔매고 있는 우리 어머니를 보았다면 어떻게 했을이지 궁금하다. 과연 그들이 어머니를 보았을 때,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까? 그들이 친절한 말 한마디라도 도와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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